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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3인의 카이사르
- 출간일
- 분야
- ISBN
- 2015년 05월 11일
- 역사
- 9791157666720
- 면수
- 판형
- 제본
- 366쪽
- 152mm×225mm
- 무선
- 출간일
- 분야
- ISBN
- 면수
- 판형
- 제본
- 2015년 05월 11일
- 역사
- 9791157666720
- 366쪽
- 152mm×225mm
- 무선
『예수와 3인의 카이사르』 저자
김춘봉과의 인터뷰
“이해 불가능한 명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조롱이다. 이성이 작용할 수 있으려면 먼저 개념이 명확해야 한다.” - 토머스 제퍼슨
◆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1941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950년 6.25 발발 당시, 평양에서 살다가 다음 해 1월, 월남하면서 동족상잔의 참상을 보고 겪었기 때문에 ‘애늙은이’ 소리를 들어가면서 자랐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돼서도 여러 가지 생각으로,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 무렵부터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무신론자’라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말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그만 둘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에게 독창적 메시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태생적으로 사람은 창조 정신을 갖는다. 그 정신력으로 활기차게 살자’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색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교파 하나 만들자면서 유혹하는 사내가 다가오기도 하고 글을 써야 한다면서 작가가 되라고 말한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몇 권의 책을 선물하면서 끈질기게 권유했습니다. 그런데도 글을 쓰지 못하니까, ‘더 이상 당신과 만날 이유가 없어졌네요’ 하면서 제 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떠난 다음에야 그리움이 사무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 책을 집필하면서
Q.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A. 예수의 역사성을 찾아 나섰던 알버트 슈바이처는 찾지 못하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생각과 시대 배경을 예수에게 투사했다면서 이상적인 이미지일 뿐 예수의 참된 가르침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도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찾으려는 것은 불가능하고,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찾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심증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끈질기게 도서관과 인터넷을 뒤지면서 수집한 정보 조각들을 퍼즐처럼 짜 맞추면서 모자이크 기법으로, 마침내 예수의 역사성과 그분의 진짜 메시지를 찾아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Q. 제목을 결정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A. 수에토니우스가 쓴 『열두 명의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부터 서기 96년까지의 로마인들의 일상과 관련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풍속사 사료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열두 명 황제의 개인적인 이야기 일색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로마제국의 최고 지도자답게 인류 공존의 원대한 비전을 제시한 사람입니다. 현명한 통치자였고, 로마가 패권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자와 패자가 없는 모두가 하나의 로마로 결속되어야 한다면서 관용과 포용 그리고 소통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그는 청렴한 행정가였고,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를 쓴 해박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왕이라고 칭송했을 때 그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왕이 아니다. 그저 카이사르일 뿐이다.”
190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몸젠’은 로마 건국으로부터 카이사르의 사망까지 연구하고 발표한『로마사』에서,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라고 카이사르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런데도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열두 명이나 된다고 말했으니, 그는 카이사르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사림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칼리굴라는 카이사르의 원대한 비전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는 되살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네로는 불씨를 완전히 꺼버렸습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가 화자로 등장하는 이 책 제목은 『3인의 카이사르』여야 하는 것입니다.
Q. 자기만의 철학(인생관)이 있나요? 그렇다면 그것이 책에 어떻게 녹아내렸나요?
A. 르네상스 운동으로 말미암아 물질문명의 발달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정신문화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윤리와 선악의 기준을 유일신 종교가 거머쥐고 있기 때문에 정신문화는 발목이 잡힌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신론은 유럽 전역에 걸쳐서 일어난 사상운동입니다. 이론상으로는 과학적 자연주의를 취하고, 윤리 의식에 있어서는 이성 내지 공리주의를 취하고, 종교에 관해서는 이성종교 내지 무신론을 취하면서, 역사의 진보를 확신한 운동이었습니다.
특히 교회의 권위와 특권에 반대하면서 자율적 사유를 제창했습니다. 절대자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생활의 진보ㆍ개선ㆍ행복의 증진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려는 야심찬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실패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가운 일이었습니다. 르네상스를 완성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저는 이신론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려고 합니다.
Q. 집필하는 데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A. 종교는 성역이다. 감히 건드릴 수 없다. 아껴야 한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이신론적 색채가 강한 글쓰기는 시작부터가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인위적으로 없애버린 자료의 복원은 불가능 그 자체였습니다.
Q. 이 책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되시는지요?
A. 클라우디우스는 포스투무스가 유배 가던 해(AD 7), 역사가 리비우스 문하에서 학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논리적 사고가 좋아지면서 역사학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스승에게 물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왜, 글을 쓰지 않으십니까?”
그 당시 리비우스는 예순 다섯이었고, 유명한 저술가였습니다. 그런데도 절필을 선언하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크면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을 띠면서 말했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스승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리비우스는 자신이 만든 연대기, 그러니까 에트루리아의 7대 왕이 추방되고 공화정이 시작되던 해(BC 509)를 원년으로, 『도시의 건설로부터』를 저술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와 임페라토르(황제) 칭호를 받고(BC 27), 리비우스가 생각하는 원년보다 244년이나 거슬려 올라가,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건국신화와 트로이 장군 아에네이스가 이탈리아에 도착을 하고, 로마를 건국한 것처럼 다시 쓰라고 했습니다.
『도시의 건설로부터』 142권 중에서, 아에네이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하면서 시작하는 1권은 계획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건국 신화를 집어넣게 했으니, 『도시의 건설로부터』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드루수스 사망 이후(BC 9)의 역사를 더 이상 쓰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사망(AD 14) 이후, 3년이나 더 살았으면서도 황제의 행적을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생뚱맞은 내용을 9권에 넣었습니다.
“만약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탈리아로 쳐들어와서 로마와 싸웠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시의 건설에 앞서 일어난 전설들, 또는 그것이 건설된 것은 역사가의 확실한 기록보다 시인의 창조로 꾸며지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리비우스는 자신의 역사서를 픽션으로 만들어버린 황제를 시인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현대 역사가들은 리비우스의 가상 역사서 운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상 역사서가 될 수 있습니까? 리비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시인이라고 추켜세우면서 조롱했고, 능멸한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토머스 제퍼슨이 말했습니다.
“이해 불가능한 명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조롱이다. 이성이 작용할 수 있으려면 먼저 개념이 명확해야 한다.”
『예수와 3인의 카이사르』에는 이해 불가능한 명제에 맞설 수 있는 조롱과 능멸이 구석구석 숨겨져 있습니다.
Q. 집필하는 데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제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생각들을, 글로 문서화 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A4용지 1페이지조차 쓰지 못하기도 했었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주말과 휴일에 두 다리 펴고 쉬고 싶은 생각들이 밀려왔지만 그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했습니다. 6개월간 가족은 물론이고 주변사람들과의 만남조차 출간 이후로 하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한 시간들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너무 행복합니다.
Q.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 있는지요? 추천해주세요.
A. 르네상스 이후, 과학의 발달로 물질문명은 탄력이 붙었고, 정신문화는 종교에 발목이 잡히면서 꼼짝달싹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무신론 및 전통적 계시신앙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신론이 생겨났습니다. 이신론은 16세기 중엽 프랑스에서부터 전 유럽으로 파급되었습니다.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고, 거기에 있는 기적이나 부활, 재림 등 모든 비합리적인 기술을 부정함으로써 신앙의 이성화를 시도했다는 점이야말로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합니다. 18세기 말까지 논의되었던 계몽주의 사상운동이었습니다.
대표적 인사로는 나폴레옹, 볼테르, 루소, 드니 디드로, 루소, 데이빗 흄, 아담 스미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존 에덤스, 알버트 아인슈타인, 어거스트 콩트가 있습니다. 그분들의 책을 권합니다.
Q. 앞으로 어떤 책을 더 출간하실 계획이신지요?
A. 『예수와 3인의 카이사르』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유럽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런던, 로마, 바티칸시국, 피렌체, 베니스, 밀라노, 스위스, 파리를 둘러보고 왔는데, 좋은 기억은 없었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패키지 투어라서 건성건성 보았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저는 로마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 역사를 새로 쓸 정도의 지식과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관광의 시간 부족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와 3인의 카이사르』에 보면, 태생적 창조 정신을 말한 예수는 르네상스 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티칸시국의 경우, 도시 전체를 그림과 조형물로 성경 내용을 형상화해 놓았더군요.
그러니 저는 비싼 돈 들여가면서 동화의 나라를 다녀온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귀국 즉시,『 미완의 르네상스』집필을 시작했습니다. 블로그에 연재 중에 있습니다.
Q. 개인적으로의 활동과 계획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A. 사람은 태생적으로 창조 정신을 갖습니다. 창조 정신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순수 그 자체입니다. UN은 국제자연보존을 목적으로, 스위스에 본부를 둔 ‘WCU’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창조 정신도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한반도 정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쪽은 유일신 종교적 신념을, 북쪽은 주체사상을 경쟁적으로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일촉즉발의 대결 양상도 보이고 있습니다. 남쪽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그래야 북쪽도 따라서 변하게 됩니다.
Q. 마지막으로 인터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세계는 종교적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생명 경시 풍조와 부패, 그리고 불평등의 요인들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윤리와 선악의 기준을 새로 정하고, 거짓과 속임수가 어떤 형태로 눈과 귀를 막았는지 그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인터뷰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