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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만 하는 사랑, 그 아픔
“S야, 이번 달에 카드값이 너무 나왔어. 지금 이쪽으로 돈 좀 보내줄 수 있어?”
“S야, 진짜 미안한데, 우리 상견례 날 좀 미루면 어떨까? 내가 진짜 바빠서.”
그는 S에게 이렇게 자주 부탁한다. 그녀는 “지난번 돈도 아직 안 갚았잖아” 하면서 또 돈을 부쳐주고, 부모님 기분 상하지 않게 눈치 보며 어떻게든 상견례도 미룬다. 싸우고 갈등이 일어날 법도 한데 남자는 부탁하고 여자는 들어주는 관계로 굳어졌다.
S의 이런 마음은 동성 친구에게는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유독 이성 관계에서만 ‘착한 여자’가 되었다.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했겠어’라는 측은지심이 들고, 서로 도우면 사랑이 더 깊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어쨌건 지금 남자친구와 만날수록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다. 그녀는 이 남자만큼은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자기가 맞추어 주는 쪽이 되니 ‘정말 이번에도?’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심 끝에 상담을 시작했다. 상담이 거듭되자 그녀는 질문이 생겼다.
‘왜 도와주고 해결해주어야 내 마음이 편해지지?’
‘그 사람도 좀 힘들면 안 되나? 그가 어려운데 내가 왜 더 불편하지?’
S는 자신의 이런 사랑 양식이 도대체 어디서 강해진 것인지 알고 싶었다. 어렴풋하게 부모와 있었던 일, 불안했던 것들이 떠올랐지만 그저 파편 같은 조각들이었다. 그녀는 그 조각들을 맞춰보고 싶었다.
구원자 역할을 자청하는 이유
그녀의 강한 욕구는 ‘의존하고 싶음’이었다. 즉 자기가 기댈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녀의 어린 시절 경험으로 형성된 무의식 세계에서는 ‘너는 의존할 수 없어, 어디 기댈 데도 없어’라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렸고 그 무의식의 소리는 너무나 끔찍했다.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막을 동원했다. 그것은 ‘역할 역전role reversal’과 ‘투사projection’라는 방어기제였다.
역할 역전이란 자신을 주체에서 객체로, 객체에서 주체로 바꿔놓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보살핌과 관심을 받고 싶지만, 즉 받아야 하는 객체로써 그것이 잘 안 될 것이라고 여겨질 때, 자신이 누군가를 보살피고 애정을 주는 주체로 그 역할을 전환하는 것이다.
투사는 자신이 가진 욕구나 감정, 충동을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의 의존 욕구를 상대방이 가지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것을 외면하면 마치 자기가 외면당한 듯 괴로워한다.
S는 조금만 힘든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향해서 자신의 의존 욕구를 투사했다. 그러면서 돌봄을 받는 객체, 곧 대상이 되고 싶었지만 도저히 불가능하니, 돌봄을 주는 주체, 곧 구원자가 되면서 대리 만족을 얻었다. 동병상련은 자기 아픔을 알고 남의 아픔을 같이 느끼는 상태인데, 투사라는 방어기제는 진짜 욕구와 불안을 자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욕구나 불안을 느끼면 그냥 무의식으로 넘겨버린다. 방어기제는 자기 마음을 모르게 가려버린다. S는 관심과 인정을 원했지만 자기 힘으로 얻을 수가 없었다. 의존하고 싶어도 그 대상이 없었다. 거의 사춘기가 될 때까지 오빠가 주인공인 무대에서 살아야만 했다. 오빠는 남자니까, 약하고 작게 태어났으니까, 그리고 공부를 아주 잘하니까 부모는 늘 오빠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여자니까, 튼튼하고 크게 태어났고 공부를 보통으로만 하니까 주인공은커녕 늘 무대 밖에서 혼자 바라보고 혼자 박수 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춘기 때 로맨스 만화와 영화를 많이 보았고 남자들에게 사랑받는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많이 했다. 아주 잠깐 행복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오빠가 주인공인 집의 한 귀퉁이에 있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면서 존재감을 찾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남자애들에게 친절하게 하고 웃으니 나를 좋아하는 애가 생겼다. 친구들에게도 조금 더 착하게 하니까 내게 부탁까지 했다. 집에서도 큰언니가 하던 집안일을 도맡으니 엄마가 나를 찾았다. 이런 깨달음들은 그녀의 몸과 눈을 자동으로 환경과 타인을 향하게 했다. 그리고 거기에 익숙해져 갔다.
성인이 되어 연애를 하면서는 자신의 의존 욕구를 슬쩍 밀어냈다. 그들에게 맞춰주면서 하나 되는 경험을 하려고 했다. 특히 힘들고 어려운 남자를 도와주면서, 자신에게 힘이 생기는 것처럼 느꼈다. S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면서 안정을 찾은 것이다. ‘누군가 필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S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무대 뒤에서 너무 고달팠고, 그것을 그냥 무의식으로 넘겨버렸다. 그러나 무의식적 소망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얼마나 공허하고 외로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