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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새크라멘토가 싫어… 언덕이 많아서….”
<레이디버드〉 속 두 소녀는 촌스럽다고 여기는 고향을 벗어나 뉴요커가 되고 싶은 욕망을 ‘언덕’이라는 단어로 에둘러 표현한다. 새크라멘토에서 태어나 자란 17살의 소녀는 늘 뉴욕의 대학을 꿈꾸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과 가톨릭 고교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다. 비뚤어진 반항적 성격, 여주인공 시얼샤 로넌(크리스틴 役)의 새크라멘토에 대한 불만은 마치 자신이 어릴 적 악역을 맡았던 영화 〈어톤먼트(Atonement, 2008)〉에서의 브라이오니와도 닮아 있다.
13세의 브라이오니는 언니 키이라 나이틀리(세실리아 役)와 제임스 맥어보이(로비 役)의 사랑에 질투를 느껴 거짓말로 이들에게 비극적 운명을 초래하고 결국 평생을 속죄(Atonement)하며 살게 된다.
이곳 새크라멘토 출신 여성인 그레타 거윅(Greta Gerwig) 감독은 자전적인 영화 〈레이디 버드〉를 통해 도시의 아름다움과 불우한 크리스틴의 성장과정을 꾸밈없이 보여 준다. 크리스틴의 과거가 마치 자신의 과거, 아니 우리 모두의 과거인 것처럼….
영화 후반부에 시얼샤 로넌이 고향을 떠나기 전 새크라멘토 시내를 돌아보며 자신이 벗어나고 싶었던 도시가 그토록 아름다운 곳이라는 걸 알고 후회하는 장면이 애잔하게 흘러간다. 이들 두 여성 그레타 거윅 감독과 시얼샤 로넌은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2019)〉에서 또 한 번 환상적인 호흡을 이어 갔다.
다코타 패닝 주연의 〈스탠바이, 웬디(Please Stand By, 2017)〉는 또 다른 〈레이디 버드〉다. 우리 자신의 꿈 이야기를 일기장에 담는 기억의 습작이다. 이번에는 자폐성 장애를 가진 여주인공 웬디가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600㎞의 여정을 떠난다. 파라마운트를 향해 꿈을 들고 향하는 웬디의 소소한 일탈을 담백한 웃음으로 담아냈다. 그녀가 가는 길 곳곳에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영상미가 드러난다.
〈아이 엠 샘(I Am Sam, 2001)〉에서의 어린 다코타 패닝은 벌써 이 영화만큼이나 성장했다. 아프지만 희망을 전달하는 이야기, 〈스탠바이, 웬디〉 역시 레이디 버드의 제작진이 만들었다.
점심 무렵 골드 카운티에 있는 새크라멘토 리버 트레인에 올라 수제 맥주로 목을 축이며 서부 프런티어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1848년 1월 미국의 역사를 뒤흔드는 금이 새크라멘토에서 최초로 발견되면서부터 ‘골드러시(Gold Rush)’를 이루며 30만 명이 캘리포니아로 모였다. 열차는 이들 포티 나이너스(Forty - Niners, 캘리포니아 이주가 보격화된 1849년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의 부푼 꿈을 안고 우드랜드를 향해 10마일의 아주 느린 속도로 달린다. 차창 밖으로 한적한 농장의 건초더미에 누워 카우보이 모자로 햇볕을 가리고 고단함을 달래고 있는 케빈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얀색 캘리포니아 주청사 건물이 내다보이는 한 카페에서 진한 아메리카노 한잔과 함께 제니스 이안의 노래 〈At Seventeen〉(1975)을 듣는다. 중세 유럽의 음유시인처럼 읊조리는 제니스의 목소리에서 소외받은 젊은 청춘들의 아픈 상처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I learned the truth at seventeen
That love was meant for beauty queens
And high school girls with clear skinned smiles
Who married young and then retired
The Valentine’s I never knew
The Friday night charades of youth
Were spent on one more beautiful
At seventeen I learned the truth
열일곱 살에 진실을 알았죠
사랑은 예쁜 아이들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을
그리고 깨끗한 피부의 미소를 가진 여고생들은
결혼도 일찍 하고 은퇴를 하죠
난 발렌타인데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젊은 날의 금요일 밤 제스처 게임은
보다 예쁜 애를 중심으로 진행됐어요
나는 열일곱 살에 진실을 알았어요
17살의 나는 우울했다. 지독히 가난한 시골의 사춘기 소년에겐 미래에 대한 희망도 바람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 체념을 먼저 배웠다.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함에 대학을 포기하고 실업계 고등학교를 택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적성에 맞지 않는 3년의 학과 생활 때문이었다. 방송반에서 틀어 주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가 가끔씩 위안거리였지만 난 늘 혼자였고, 스스로 그 익숙함을 배웠다. 그때 나의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였으며 꿈꿀 수 없는, 꿈을 꿔서도 안될 팝 칼럼니스트의 꿈을 가슴속에 감추며 자랐다.
코린트 양식으로 지어진 주 의회 의사당의 황금 원형 지붕을 빗방울들이 요란하게 두들기기 시작한다.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우산을 들고 있는 안내 직원에게 부탁했다. 캘리포니아에 정말 오랜만에 내리는 비라는 말을 꺼내며 동양의 낯선 이방인에게 건네는 그녀의 하얀 미소가 오히려 슬프게 느껴졌다.
바로 이곳에서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이 그토록 갈망하던 뉴욕의 대학이 마치 내가 어릴 적 꿈꾸었던 미래의 모습처럼 여겨진다. 그 시절 대학에 가고 싶다는 내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나를 부둥켜 안고 어머니가 흘리셨던 수많은 눈물들… 그리고 공항에서 그토록 냉정하게 대했던 딸을 떠나보내며 〈레이디 버드〉의 엄마가 차 안에서 흘렸던 눈물들이 빗물이 되어 커피숍의 보라색 어닝 라인을 따라 뚝뚝 떨어진다.
이젠 오십을 훌쩍 넘어선 나이지만 내 어린 시절의 아련함은 또 하나의 추억이 되어 왼쪽 가슴 깊숙이 내려앉는다.
어느새 비가 멈춰 버린 회색빛 새크라멘토 시내를 벗어나며 그 가여웠던 17살의 나를 안으며 조용히 혼잣말을 건네어 본다.
그래 잘했어, 잘 버텨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