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인터뷰

‘할아버지는 왜 회사 안 가요?’의 저자 이원경과의 만남

2020.12.10

1. 제목을 할아버지는 왜 회사 안 가요?’라고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질문에 답하려면 제가 남보다 일곱 해나 일찍 은퇴했다는 사실을 먼저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저에게는 어느 정도의 부채의식을 안겨 주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다섯 살짜리 손녀가 화상통화를 하는 도중에 그 질문을 했을 때 저는 바로 대답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마음속에 자리 잡은 걸 보면 말입니다. 우선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화두를 던져 주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한 그 질문이 저 자신의 처지를 잘 드러내 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해서 책의 제목으로 정한 것입니다. 저는 남과 같이 했다면 내년 2월에 정년을 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책이 아까 말한 부채의식을 어느 정도 덜어 주면 좋겠습니다.

 

2. 이 책을 꼭 읽어 주셨으면 하는 분이 있으신가요?

퇴직 후 일 년이 지나서 휴대폰을 갖게 되었습니다. 곧 카톡을 통해 친지들에게 글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글이란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면서도 막상 쓰려고 하면 이런저런 자의식 때문에 방해받고 마는데 저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저의 글은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글이니,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이라고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꼭 읽어 주기를 바란다는 생각은 해보질 못했습니다. 다만 출판 과정을 거치면서 제 책이 글쓰기 특히 (넓은 범위의) 수필 쓰기를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왜냐하면 저도 수필의 글감은 어떻게 정하는지, 글은 어떻게 끌고 나가는지, 마무리는 어떻게 지어야 하며 퇴고는 어떻게 하는지 등에 대해 잘 모르고 시작했으니까요(사실은 지금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니 나중에 책이 될 가능성 같은 건 염두에 없었지요. 이렇게 좌충우돌을 거쳐 나온 책이 그분들의 기운을 북돋아주길 기대해봅니다.

 

3. 저자님께서는 공학자이신데, 언제부터 인문학에 관심이 깊으셨나요? 어릴 때부터였다면 왜 문학이 아닌 공학을 선택하셨나요?

제가 공학을 선택한 건 수학이 좋아하는 과목이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학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인지 대학 일 학년 말쯤에 국사학과로 편입할까를 망설인 적이 있습니다.

인문학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니 범위를 좁혀서 말해봅시다. 저는 조선조의 인물에 대해 관심이 생겨났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아버지의 책장에서 국역 퇴계집을 찾아낸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집안의 족보에는 육형제 중 다섯째인 16대 조부(, )의 동생이 퇴계(, )라고 나와 있으니, 자연히 그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에 관한 문헌을 거쳐 그와 교제한 인물 또는 제자 등으로 관심의 범위를 넓혀 갔고, 결국 유학 일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사서(四書)에 입문하기엔 한문 실력이 부족해서 갈증을 느껴 왔습니다. 결국 퇴직 후, ‘천자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이화의 한문공부를 거치고 나서야 류종목의 논어의 문법적 이해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원로 철학자는 인문학이란 모국어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문학이란 게 인간에 대한 탐구에 바탕을 두고 있는 데에다가, 개인이라는 샘플이 모여서 인간세상이라는 앙상블을 이룬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보면 그 원로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수필이야 말로 대중이 인문학을 접하고 실행하는 출발로 삼기에 적절한 장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그런 과정의 어느 지점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4. 저자님께서 평소 읽으시는 도서는 어떤 종류인가요?

답하기가 난처한 질문이군요. 평소 독서를 특정 분야를 정해두고 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그렇습니다. ‘평소란 단어를 최근이라고 바꾸고도 두 부류로 나누어 이야기하면 좀 편할 듯합니다. 즉 특정 주제에 대한 탐구를 염두에 둔 독서와 그렇지 않은 경우 말입니다.

먼저 전자부터 봅시다. 최근에 저는 다산 정약용이 중모현을 지나며 지은 시에서 비롯한 글을 썼습니다. 중모현은 저의 고향인 경북 상주시 모동면의 옛 이름입니다. 그곳에 세워진 어느 시비에는 그 시가 새겨져 있는데, 덧붙여진 설명이 오류란 걸 알게 되면서 다산의 행적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산의 당시 행적을 알려 주는 문헌을 모아서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을 확인하고 글을 쓰기 위한 의도적인 독서였던 셈이지요. 그 직전에는 중국 청대의 소설 홍루몽을 읽었는데, 그건 논쟁극장이란 책이 읽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설은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모아 홍학이란 학문이 열린 지 백 년이나 되었고, 그 책이 바로 홍학백년을 집대성한 책이라고 해서 구미가 당겼던 것입니다. 같은 시기에 저는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도 읽었습니다. 그전에 저는 장자의 내편을 읽고 장자를 읽다가란 글을 쓰다가 멈춘 일이 있습니다. ‘선행을 하더라도 이름이 나는 데까지 다가가지는 말고(爲善无近名),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법에 저촉되는 데까지 다가가지는 마라(爲惡无近刑)’는 구절이 마음에 걸려서입니다. 이런 생각을 드러낸 책이 어떻게 유가의 서적과 경쟁해서 살아남았는지 궁금해져서 중국철학사를 살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 책 논쟁극장중국철학사를 읽고 몇 가지 탐구할 방향은 정해두었습니다. 그러나 특정 주제에 대한 글을 당장 쓸 마음이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아직은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장래의 일을 누가 알까요?

다음엔 특별한 주제 의식이 없이 독서하는 경우를 들어봅시다. 이 경우 저는 아무 제약이 없이 편할 대로 책을 고릅니다. 전기(傳記), 자서전, 경제학, 문학, 수학, 미술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습니다. 읽다가 잘 읽히지 않으면 중단하기도 합니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과 플라톤의 향연처럼 두 번째 시도에서 읽어 낸 것도 있습니다. 최근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가 말았습니다. 제가 이 책을 독파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합니다. 지금은 나디아 무라드와 제나 크라제스키의 더 라스트 걸을 읽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다가 어느 주제에 끌리면 그 분야에 한동안 머물기도 합니다. 남들도 이렇게 하지 않나요?

 

5. 저자님께서 평소 존경해 오고 눈여겨봐 왔던 멘토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반가운 질문입니다. 소개하기에 알맞은 분이 계시니까요. 그분은 인하대학교 기계공학과에서 20여 년 전 은퇴하신 박철희 선생입니다. 선생께서는 1960년대에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에서 비선형진동을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같은 목적으로 그곳으로 유학하려던 저에겐 꼭 알맞은 조언자였습니다. 대구에서 올라오는 저를 위해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부근을 약속장소로 잡으신 선생님을 처음 뵙던 19846월 어느 날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선생의 조언 덕분에 무사히 학업을 마친 저는 4년 후 귀국해서 학위논문을 보내드렸습니다. 곧 그분은 저를 인천으로 불러 강연을 시키셨지요. 한 시간 예정이었던 강연 시간이 네 시간으로 연장되는 동안, 저나 청중이나 시간이 그렇게 흐르는 줄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당시엔 어째서 피차간에 당연한 일로 여겨졌는지 신기합니다.

곧 선생님은 저에게 앞으로의 연구계획을 물었고 저는 장차 연구를 보(beam)나 원판(circular plate) 등으로 확장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장차당장으로 바꾸도록 저를 몰아붙였습니다. 저로선 갓 귀국해서 국내의 분위기도 모른 채, 익숙하지 않은 연구를 수행하겠다고 했다가 낭패를 볼까 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일단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 뒷걸음질하는 건 볼 수 없다는 듯이 모르는 걸 연구하는 게 진정한 연구라며, 저를 과학재단의 3년 과제에 참여시키셨지요. 결국 선생님의 그 조언이야말로 저에겐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비로소 원판 연구를 시작하게 된 저한테 지도받은 다섯 명 중 네 명이 그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으니 말입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선생님의 온화한 인품에서 어떻게 그런 지도력이 나왔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또한 평생 제고집대로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그분의 말씀은 순순히 따랐는지 모를 일입니다.

 

6.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이 있다면 한말씀 해주십시오.

책을 내는 데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책을 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책을 내느냐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후자를 너무 의식하면 시작하기도 어려우니 당분간 책은 잊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 즉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부터 써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원고가 쌓이면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글의 수위도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함량 미달이거나 적절치 못한 원고를 솎아 내고, 내용 중 일부를 깎아낼 능력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단계에 이르면 책은 출판에 가까워지더군요. 부디 용기를 내시고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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