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월비산의 두견새는 슬피 우는데》를 집필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버덩의 새벽은 농부의 잠을 깨우는 종달새가 푸른 하늘로 높이 치솟아 올랐다. 종달새의 울음소리는 농부들을 깨웠고, 땅을 가꾸라고 지지배배 울어 대던 곳이었다. 또 수리봉에 진달래가 피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났는지 봄날의 두견새 울음소리는 화창하고 평화로운 마을을 곱게 다듬어 주었다. 두견새 울고, 월비산의 잔설은 눈 모자를 썼다. 따사로운 오후 박 바가지엔 배추 뿌리 담아 들고 나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또 다른 자연의 일부였다. 마을 사람들은 자연에 기대어 있었으니 그들의 평온한 삶은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자연에 기대어 살도록 도와준 모든 것에 감사해 하며, 안산에 달이 뜨고 들판의 개구리들도 풍년을 노래했다.’
마을의 전경을 화폭에 그림 그리듯 글로 그려 놓은 시인은 1932년 휴전선 이북 강원도 고성군 보호리에서 출생했다. 시인의 나이 18세에 조선인민군에 끌려갔다. 그러나 시인은 인민군에서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향에서도 공산당원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그들의 눈을 피해야 했었다. 그리고 금강산 아래 고성이라는 작은 농촌 마을에서 수복지구인 속초로 피난을 나와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세상의 생을 마쳤다.
나는 시인의 자작시 〈월비산의 두견새는 슬피 우는데〉를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천신만고 끝에 천 길 낭떠러지에서 다시 살아나 생을 이어 온 시인이 젊은 시절부터 노구의 몸이 될 때까지 고향을 그리워한 이야기를 눈물 없이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동족의 목숨을 앗아 간 한국전쟁의 폭풍우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전쟁터의 참혹한 북한 사회를 경험한 《끝나지 않은 전쟁》을 통해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여 출간하였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전쟁의 고통 그리고 휴전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한 채 소시민의 삶을 이어 가야 했던 시인이었다. 그리고 시인은 심연의 깊은 마음 한곳에는 잊히지 않는 고향을 가슴에 묻은 채 피난을 떠나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생을 이어갔다. 이는 고향 월비산의 두견새가 탁란을 하고 두견새의 새끼를 부르는 간절한 울음소리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생각된다.
2. 제목을 《월비산의 두견새는 슬피 우는데》로 정한 이유가 있나요?
‘월비산’은 시인의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앞산이다. 여름철이면 시인이 살던 마을에서는 두견새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시인에게 두견새의 울음소리는 슬프게 들렸다. 시인이 본 두견(杜鵑)새는 휘파람새·굴뚝새·산솔새·검은지빠귀·촉새 등의 새로 다른 새의 둥지에 탁란을 하고는 그 둥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여름철 내내 탁난을 한 둥지 주변에서 울음소리를 낸다. 그 두견새의 울음소리는 시인에게 고향을 떠나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슬픈 소리로 들렸다.
시인이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애끊는 그리움은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비극인 6·25가 끝난 지 70년이 다 되어 간다. 1950년대 혼란한 시대의 고단하고 힘들었던 삶을 살았던 시인은 고향을 떠나 강원도 속초에 정착하여 피난민으로 살아가는 동안 한시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다. 이 시의 시적화자는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떨쳐 내지 못한다. 오히려 고향 상실의 아픔은 가슴속에 절절히 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고향은 젊은 날의 시간이 정지되어 시적화자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가장 애착이 가는 시나 구절이 있나요?
‘山(산)은 山(산)으로 / 바다는 바다로 / 길은 길로 이어졌는데 / 그 길은 鐵條網(철조망)에 가로막혀 / 오고가지 못 한다 / 새들은 自由(자유)로이 오가는데 / 나는 望鄕(망향)의 追跡子(추적자) 되어 / 외롭게 서 있다 / 비둘기 꼬리 펴 날고 / 杜鵑(두견)새 울며 茂盛(무성)했던 季節(계절) / 해 뜨고 달 뜨고 어두운 밤 천둥 친다 / 숨 가쁘게 흘러갔던 / 半平生(반평생)의 놀이터 / 어릴 때 兵丁(병정)놀이하던 그 땅이 / 戰爭(전쟁)터가 되었다니 / 이젠 헤어져 故鄕(고향) 생각만 난다 / 城(성)이 높아 高城(고성)인지 / 砲聲(포성)이 높아 高聲(고성)인지 / 南江(남강)에 鱗葉(인엽)을 펴 / 金剛山(금강산) 오르던 鰱魚(연어)야 / 名山(명산)인지 알고 오르는가 / 이제 / 저 南江(남강)에 / 땅을 치고 발 굴러 몸부림 쳐 봐도 / 그때 그 鰱魚(연어) 한 마리 볼 수 없다 / 내 故鄕(고향) 그리워 / 못 가 보고 불러만 본다 / 외로이 展望臺(전망대)에서 / 내 故鄕(고향) 바라만 본다’ 〈고향〉 전문
이 시의 시적 소재를 통해 주제 의식의 지향점은 한결같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귀착되어 있다. ‘山(산)은 山(산)으로 / 바다는 바다로 / 길은 길로 이어졌는데 / 그 길은 鐵條網(철조망)에 가로막혀 / 오고가지 못 한다’고 하여 가로막혀 오고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대한 강한 현실 인식이 내재 되어 있다. 그리고 ‘땅을 치고 발 굴러 몸부림 쳐봐도’로 내면의 심리적 동작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강하게 확장되어 간다. 그리고는 ‘내 故鄕(고향) 그리워 / 못 가 보고 불러만 본다’로 애끊는 그리움이 채념의 상태로 치환되고 있다
首丘初心(수구초심)이라고 했던가. 세월이 흘러가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향을 그리워하고 죽기 전에 한 번은 가 보고 싶은 것이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이 가질 수 있는 인지상정의 마음이다.’
4. 이 책을 꼭 읽어 주셨으면 하는 독자가 있으신가요?
《월비산의 두견새는 슬피 우는데》의 월비산은 351고지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다음과 같이 지정되어 있다. 동해안의 요충지인 월비산(459고지), 208고지, 351고지의 피아 공방전은 1951년 7월 15일부터 1953년 7월 18일까지 계속되었으며, 개전 이래 수십 차례에 걸쳐 국군 제5, 11, 15, 수도사단 용사들과 북한군 제6, 7, 19사단은 월비산, 208고지 351고지를 뺏고 뺏기기를 반복하다가 1953년 7월 29일 휴전협정으로 인하여 피아 전투가 종식되었다.
월비산의 351고지는 휴전되기까지 동해안의 요충지로 피아간 351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참전한 장병들의 전공을 기리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후대에 그 원혼을 전하고자 1957년 7월 15일 제3군단에서 현내면 대진리에 건립·관리하여 오던 중 통일전망대가 설치되어 1988년 12월 26일 그날의 격전지가 직접 보이는 곳에 이전되었다.
시에 나오는 통일전망대가 바로 이곳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남·북한이 전쟁을 잠시 멈추고 휴전이 되어있는 상태이다. 우리 사회의 기둥이고 미래에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젊은 세대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5.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다면 한 말씀 해주십시오.
이젠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삶이 나의 삶과 이어지고, 그리고 나의 삶이 또 나의 자녀의 삶과도 연결되어 나의 자녀들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유전자가 나를 통해 나의 자녀에게 이어졌지만,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막연한 책무를 느낀다. 아버지 없이 내가 어떻게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으며, 나의 자녀 또한 부모의 도움 없이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겠는가! 각자 사회로부터 그리고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정신적·물직적 지원과 그리고 사회인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눈으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사회로부터 많은 도움과 각자의 노력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축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 그리고 우리들의 이웃에 진 빚이었다. 그리고 부모도 자녀에게도 일정부분의 빚을 안고 있다. 그 빚은 나의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자녀에게 얼마만 한 크기로 다시 되돌려 줄 수 있는가 하는 상속받은 사랑의 빚이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사랑의 빚은 각자의 능력 범위 내에서 사회에 되돌려 주어야 하는 책무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상의 주어진 규범에 적응하고 각자 세상과 조화롭게 자신의 삶을 사회 환경에 적응하여 이어 가도록 노력하며 삶을 이어간다. 사랑과 열정으로 가르친 부모를 만나 잘 성장하여 사회의 일원이 되어준 나의 자녀에게도 감사함을 느낀다.
또한 나의 아버지의 글이 한 권의 책으로 엮는 작업은 아버지의 삶이 나와 함께 이어간 흔적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삶을 담은 시집이 세상으로 나오기까지 고마운 친구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내가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사후이지만 조그만 보답을 이 시집에 담을 수 있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