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당동네
"모두들 숨어!”
빡빡이 물꾸럭이 대장처럼 소리쳤다. 좁쌀구젱기가 얼른 빌레 밑에 바위처럼 붙어 몸을 숨겼다. 보말도 검은 돌 아래로 숨어들었다. 물꾸럭은 빌레 틈바구니 깊숙이 다리를 구겨 넣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순심이었다. 순심이가 동그란 눈으로 웅덩이를 구석구석 훑고 있다. 순심이의 까만 눈동자가 다가오자 웅덩이 식구들은 숨조차 멈추고 깊은 빌레가 되었다. 다행히 아무도 들키지 않았다 순심이가 먼 바다 쪽으로 털레털레 걸음을 옮긴다.
“휴, 살았다!”
미로를 빠져나간 빡빡이 물꾸럭이 순심이 뒤를 슬금슬금 쫓았다.
“순심이, 왔구나. 이레 오라!”
벌써 한바탕 물질을 마친 잠수 할머니들이 불턱(해녀들이 작업을 마치고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때는 곳)에서 순심이를 불렀다. 잿불 속에서는 구젱기(소라)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할머니 병은 어떵허니?”
“예, 그냥…….”
“에고, 기어사!(그러게!) 살암시믄 살아진다. 이 착헌 거……”
순심이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산다. 잠수였던 어머니는 순심이를 낳고 백일만에 물에 들었다가 영영 나오지 못했다. 술만 마시던 아버지는 순심이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상잠수인 할머니가 혼자 순심이를 키우기 위해 악착같이 물질을 했다. 딸을 바다에 바치고도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던 할머니는 지난겨울에야 비로소 맥을 놓아 드러누웠다.
“너 또 할머니들이 나눠줬구나?”
“으응…….”
순심이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었다. 어촌계장 딸인 경숙이는 3학년 대장이다. 아이들은 모두 경숙이 말에 복종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 있어도 경숙이가 달래면 주어야 한다. 순심이는 경숙이에게 바칠 변변한 물건이 없었다. 그래서 순심이는 경숙이에게 미운털이 박힌 지 오래였다.
“너 이거, 나 줘!”
경숙이가 잠수 할머니들이 챙겨준 오분자기와 구젱기를 손에 들고 말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경숙이가 팔을 뻗나 보다 했는데 순심이를 물로 밀어 넣었다. 구덕도 같이 물속으로 빠졌다. 경숙이가 얼른 물속으로 잠기는 구덕 속을 움켜 자기 구덕으로 챙겨 넣었다.
“이거 너 꺼 아니지? 나는 분명 바다 속에 거 건졌다!”
“…….”
순심이가 구덕하고 물에 둥둥 뜬 미역 몇 개를 겨우 건져 바구니에 담았다. 순심이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경숙이를 피해 물속을 걸어 나갔다. 순심이의 걸음을 따라 작은 물결이 움직인다. 며칠 전 순심이에게 목숨을 신세 진 빡빡이 물꾸럭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순심이 손에 잡혀 있었다. 물꾸럭은 순심이 손에 뱀처럼 엉겨 붙으며 겁을 줄 생각도 못하고 봄 햇살처럼 늘어져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어어? 이상하다!” “어디 아프니?” 다리 돌기를 세워 무섭게 엉겨 붙기는커녕 축 늘어져 있는 물꾸럭이 이상했던지 순심이가 다정히 물었다. “꼭 아픈 우리 할머니 같네. 아프지 말아야지.” 순심이가 웅덩이에 슬며시 물꾸럭을 도로 놓아주었다. |
“분명 이 길이 맞는데?”
오던 길이 아니어서 순심이는 길이 자꾸 헷갈렸다. 바다 길은 거기가 거기 같아서 자칫 잘못하다 깊은 물에 빠질 수도 있었다.
순심이가 바다와 연결된 깊은 물 쪽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빡빡이 물꾸럭이 지켜보고 있었다. 점점 깊은 바다 쪽으로 걸어 나가는 순심이를 보고, 빡빡이 물꾸럭이 뱅뱅 순심이를 맴돌았다.
물이 어느새 순심이 목까지 차올랐다. 구덕을 들고서는 서툰 헤엄도 소용없었다. 순심이는 오도 가도 못한 채 바다 가운데 서서 울음을 터트렸다. 물에서 나오지 못한 어머니가 떠올랐다. 순심이가 바다에 오는 걸 죽도록 말린 할머니도 떠올랐다. 무서웠다.
빡빡이 물꾸럭이 8개의 다리를 쭉쭉 뻗으며 순심이 앞에서 다시 맴을 돌았다. 넋이 나가버린 순심이는 빡빡이 물꾸럭이 앞에서 그렇게 설쳐대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빡빡이 물꾸럭이 놀라지 않게 살금살금 다리 하나를 순심이 종아리에 갖다 대었다.
순심이가 드디어 빡빡이 물꾸럭을 발견했다. 낯이 익었다. 며칠 전에 놓아준 그 물꾸럭이었다. 빡빡이 물꾸럭이 순심이 다리에 자기 다리를 붙인 채, 얕은 물 쪽으로 먼저 헤엄쳐 갔다. 빡빡이 물꾸럭을 따라 순심이도 발을 내디뎠다. 빡빡이 물꾸럭이 순심이를 끌고 조금씩 바다를 빠져나왔다.
빡빡이 물꾸럭의 잔소리가 잔물결처럼 다정했다. 순심이는 겨우 물에서 기어 나와 빌레 위에 기대 누웠다.
통일신라시대 장보고 대사가 청해진을 설치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5월 31일 바다의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바다의 날, 아이와 함께 '바다'이야기를 하시길 바라면서, 좋은땅 출판사에서 나온 바다 동화 <볼락잠수 앙작쉬>의 바당동네의 일부를 소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