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식민지였던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습니다. 일본은 모집, 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면 조선인을 강제동원했습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 명이 끌려갔습니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중 최소 60만 명 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습니다.
노역에 시름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고향에 간다는 기대에 부풀어 배에 올랐다.
출항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선원들은 "물이 떨어졌다" "기름을 보충해여 한다" 등의 말을 하며 배를 한적한 곳에 정박했다. 오후 5시쯤이었을까. 갑자기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두 동강 났다. 사람들은 난간과 돛대 등을 붙잡고 ‘인간띠’를 만들며 버텼다. 맨 윗사람이 손을 놓치자 함께 매달려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돛대에 매달렸던 이 씨는 이를 악물고 버틴 끝에 민간 어선에 구조됐다.
우키시마호 참사를 증언할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구조 작업에 참여했거나 목격했던 사람들은 사망 또는 노환으로 증언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당시 배에 탑승했던 이들은 대다수 20대 이상으로 살아 있다면 90세가 훌쩍 넘었을 나잇대입니다. 한 생존자는 중 함께 진상 규명 활동을 했던 이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났다며 본인도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유골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유가족들은 지난 2012년부터 합동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부의 무관심에 애끓는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유족회장은 일본에서 유품, 유골 등을 찾아 추모 공원을 만들어 제대로 된 추모제를 지내고 싶다며 정부에서 빨리 나서서 이를 해결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고베전철 부설공사 조선인 노동자상’(노동자상)은 공사 현장에서 숨진 조선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고베전철은 지난 20~30년대 고베 시내와 일본 3대 온천인 아리마를 잇는 공사를 진행했다. 장장 34.5km에 달하는 거리였다.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은 약 1,200~1,800명. 이들은 일본인과 같은 수준의 임금과 대우를 약속받고 고향을 떠났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현실은 달랐다. 공사 현장은 가혹했다. 동일한 임금은커녕 임금 체불이 빈번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4회에 걸쳐 노동쟁의가 일어났지만 바위에 계란 치는 격이었다. 변화는 없었다. 안전장치 미지급으로 사망자도 다수 발생했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가장 위험한 작업에 배치됐던 조선인이었다.
고베전철 연혁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었습니다. 고베전철 부설공사 조선인 희생자조사 · 추도회’(추도회)의 초대 대표인 고 오치아이 씨는 93년 고베전철 본사를 방문해 고베전철의 역사를 저술할 때 조선인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은 것에 항의했습니다. 고베전철 측은 조선인 노동자 자료가 없다며, 하청 업체에서 관리해 본사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추모비 건립에도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지난 95년 한신 · 아와지 대지진 이후였습니다. 고베시를 덮친 대지진으로 6,3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고베시는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지원을 논의하면서, 재일 한국인 차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이는 조선인 추모비 건립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금을 토대로 노동자상은 지난 96년 11월 24일 세워졌습니다.